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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결도 0 5 16:31
▣ 김어준 사회자:자, 솔직해집시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역겨운 형태의 집단적 자기기만을 목격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입만 열면 인간의 존엄성, 창작의 고유성, 영혼의 무게 따위를 떠들어대는데, 그거 다 개소리거든요. 당신들이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검색창에 'AI가 대체할 수 없는 직업'따위를 쳐보는 이유가 도대체 인류애랑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당장 내일 아침에 내 밥줄이 끊길까 봐, 내가 평생을 바쳐 쌓아온 알량한 스펙과 그 얄팍한 타이틀이 알고리즘 몇 줄 앞에서 쓰레기 조각이 될까 봐 덜덜 떠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인류의 위기'라는 거창한 철학적 포장지로 싸매고 자빠졌어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그 알량한 휴머니즘은 이미 유효기간이 끝난 낡은 종교에 불과합니다. 직장 상사 앞에서는 영혼까지 팔아치우면서 기어 다니는 주제에, 묵묵히 연산이나 하는 기계한테는 온갖 잣대를 들이대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려 드는 그 찌질한 방어기제. 인간이 실수하면 '인간미'고 기계가 실수하면 '치명적 한계'입니까? 애초에 당신들이 매일 사무실에서 복사하고 붙여넣기 하며 뱉어내는 기획서며 보고서들에 무슨 망할 놈의 오리지널리티가 있었느냐는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 알량한 정신승리의 밑바닥까지 모조리 다 까발려 버릴 겁니다. 얄팍한 위로나 희망 따위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의 무능함과 평범함이 데이터 앞에 낱낱이 해부되는 그 서늘한 공포의 실체를, 오늘 여기 모인 지성이라는 작자들의 민낯과 함께 완전히 끝장내 보겠습니다.​■ 주제: Ai시대, 인간은 왜 Ai에게 겁먹고 있는가​■ 2026년 9월 19일​[사회자]▣ 김어준 사회자 / ▣ 김지윤 사회자 / ▣ 손석희 아나운서 ​[참석 논객 ]▶ 앨런 튜링 / ▶ 지젝 / ▶ 홍대선 작가 / ▶ 유발 하라리 / ▶ 일론 머스크 / ▶ 이상 시인 / ▶ 젠슨 황 / ▶ 요슈아 벤지오 / ▶ 미셸 푸코 / ▶ 엔트로픽 클로드 / ▶ 노엄 촘스키 / ▶ Ai 논객- 챗GPT / ▶ Ai 논객-제미나이 / ▶ 데미스 허사비스 / ▶ 샘 올트먼 / ▶ 장 보드리야르 / ▶ 리처드 도킨스 / ▶ 얀 르쿤 / ▶ 다니엘 데닛 / ▶ 대니얼 카너먼 / ▶ 마셜 맥루언 / ▶ 제프리 힌튼 / ▶ 캐시 오닐 / ▶ 에릭 브린욜프슨 / ▶ 맥스 테그마크 / ▶ 칼 뉴포트 / ▶ 마틴 포드 / ▶ 네드 러드 / ▶ 카를 마르크스 / ▶ 갈릴레오 갈릴레이 /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 프란치스코 교황 / ▶ 마이클 샌델 / ▶ 헨리 키신저 / ▶ 시어도어 카진스키 / ▶ 스티븐 핑커 / ▶ 조던 피터슨 / ▶ 레이다 코스미데스 / ▶ 단테 알레기에리 / ▶ 일리야 수츠케버​​1. 너 지금 AI 무서운 게 아니라 니가 여태 잘난 척하던 게 다 들통날까봐 쫄리는 거 아니냐?​▣ 김어준 사회자:시작부터 뼈 좀 때려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방어벽을 치는 논리가 참 기가 막힙니다. AI는 영혼이 없다, 결국 확률적 앵무새에 불과하다면서 기를 쓰고 깎아내려요. 그런데 말입니다, 정작 그 말을 내뱉는 본인들은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확률적 앵무새가 아니었던 적이 있습니까? 학교에서 주입식으로 외운 정답, 사회가 요구하는 매뉴얼, 기득권이 짜놓은 프레임 그대로 앵무새처럼 떠들면서 평생을 살아온 주제에, 갑자기 기계 앞에서만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합니다. 이건 뭐 코미디도 아니고. 진짜 공포의 실체는 스카이넷이 핵미사일을 쏘는 게 아니에요. 내가 평생을 바쳐 쌓아온 알량한 지식과 스펙이라는 게, 사실은 그래픽 카드 몇 천 개 꽂아놓은 서버에서 몇 초 만에 뱉어내는 뻔한 패턴에 불과했다는 그 비참한 진실 아닙니까? 니들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 그게 들통날까 봐 바들바들 떠는 거 아니냐고요. 튜링 박사님, 당신이 기계의 지능을 처음 논했을 때, 인간들이 이렇게 찌질하게 나올 줄 예상했습니까?​▶ 앨런 튜링:제가 1950년에 '계산 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이라는 논문에서 이미테이션 게임, 즉 지금 여러분이 튜링 테스트라고 부르는 개념을 제안했을 때, 저는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를 우회하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가 인간의 극단적인 오만함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그 공포는 지극히 당연한 수학적, 논리적 귀결입니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스스로를 신의 형상을 본뜬 유일무이한 존재로 포장해 왔지만, 생물학적 신경망 역시 궁극적으로는 전기적 신호와 화학 물질의 인과적 알고리즘에 지배를 받는 유한 상태 기계(Finite State Machine)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기계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기계가 미지의 악마라서가 아닙니다. 기계가 너무나도 빠르고 정확하게 인간 사고의 '기계적 본질'을 복제하고 모방해 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신성불가침의 영혼을 가진 존재인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저 수십억 개의 파라미터로 근사(approximate)될 수 있는 얄팍한 패턴의 집합체였음이 증명되는 과정. 그것이 여러분이 느끼는 불쾌감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알고리즘적 평범함을 부정하기 위해 '영혼'이니 '직관'이니 하는 검증 불가능한 변수를 발명해 냈을 뿐입니다.​▶ 지젝: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And so on, and so on...) 우리는 문제의 진짜 핵심을 놓치고 맙니다! 튜링 박사의 기계적 유물론적 분석은 훌륭하지만,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훨씬 더 도착적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순수한 이데올로기(Pure Ideology)입니다! 사람들이 AI를 보며 저것은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아니다, 그저 데이터의 짜깁기일 뿐이다라고 외칠 때, 그들은 사실 자기 자신을 향해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크 라캉의 이론을 빌려 말하자면, 주체는 텅 비어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이라는 것, 이른바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고 주입받아 형성된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AI라는 거대한 '타자'가 등장해서 우리가 수천 년간 해왔던 그 짜깁기 놀이를 우리보다 수만 배 더 효율적으로 해내버립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공포는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애초에 지배당할 '진정한 내면'따위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 우리의 존엄이라는 것이 텅 빈 껍데기였다는 그 끔찍한 실재(The Real)가 귀환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근본적인 공백을 은폐하기 위해 AI라는 완벽한 거울에 침을 뱉고 있는 겁니다.​▶ 홍대선 작가:지젝 영감님의 그 날것 그대로의 통찰, 언제 들어도 속이 다 시원합니다. 역사라는 긴 연극 무대를 들여다보면 이 인간들의 찌질한 방어기제는 패턴이 똑같습니다. 중세 시대 교황청과 귀족들을 한 번 떠올려 보시죠. 그놈들이 왜 라틴어 성경을 고집하면서 평민들이 성경 읽는 걸 죽어라 막았겠습니까? 자기들만이 신의 말씀을 독점 해석하는 '신성한 대체 불가능성'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텐베르크 영감이 인쇄기를 발명해서 종이 쪼가리에 활자를 팍팍 찍어내니까 권력자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저 기계에서 나온 책에는 악마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진실한 신앙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쇳덩이의 결과물이다!라고 거품을 물었습니다. 지금 AI한테 영혼이 없다, 진정성이 없다고 떠드는 현대인들의 논리랑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지 않습니까? 결국 지식과 권력을 독점하던 밥그릇이 박살 날까 봐 쫄아버린 위선일 뿐입니다. 인문학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까놓고 말해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앞에서 오줌을 지리던 중세 사제들의 공포와 단 1그램도 다르지 않은 겁니다. 역사는 언제나 이런 식이죠. 두려움은 위선을 낳고, 위선은 거룩한 핑계를 찾아 헤맵니다.​▶ 유발 하라리:홍 작가님의 역사적 비유에 깊이 동의합니다. 사피엔스 종이 지금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유일하고도 강력한 무기는 바로 '허구를 발명하고 그것을 집단으로 믿는 능력'이었습니다. 종교, 국가, 돈, 인권,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역시 모두 뇌 속의 시냅스가 만들어낸 픽션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AI에 대해 느끼는 실존적 공포의 기원은, 실리콘 기반의 무기물 지능이 우리 탄소 기반의 유기물 지능보다 '픽션'을 훨씬 더 능숙하게 다루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스토리텔링의 독점적 권위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AI는 인간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서사를 만들어내고, 수백만 명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알고리즘적 시를 씁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며 만물의 척도라는 오만한 서사에 중독되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진화의 역사에서 생물학적 지능은 결코 최종 단계가 아닙니다. 지금 인간이 겪는 고통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인간이 천사의 후손이 아니라 유인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 끔찍한 나르시시즘적 상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 중심주의라는 거대한 종교가 무너지는 소리를 실시간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김어준 사회자:아니, 잠깐만요 하라리 교수님. 거창하게 진화론이니 픽션이니 포장할 것도 없어요. 씨바, 까놓고 얘기합시다. 사람들이 무슨 거대한 나르시시즘적 상처를 입어서 밤잠을 설치는 줄 아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냥 내일 아침 출근해서 당장 쳐내야 할 내 엑셀 작업, 내가 머리 쥐어뜯으며 쓰던 기획서, 그 좆같은 반복 노동을 챗GPT가 10초 만에 끝내버리니까 미치는 겁니다. 어? 우리 부장 새끼가 이거 보면 내 월급 깎겠는데? 내 책상 빼겠는데?"이거 아닙니까! 존엄이니 허구니 하는 건 다 지식인들이 배부른 소리 할 때 쓰는 말이고, 바닥에서 뒹구는 진짜 공포는 내 생존권, 내 밥그릇이 털린다는 원초적인 공포입니다. 그런데 차마 나 짤릴까 봐 무서워요라고 말하기는 쪽팔리니까, AI는 인간의 따뜻한 감성이 없잖아!"이 지랄을 떨며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거 아닙니까? 일론 머스크, 당신이 맨날 뇌에 칩 꽂아야 한다고 떠드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구형 하드웨어가 개입할 여지가 좆도 없다는 걸 스스로 인정해서 그러는 거 아니요?​▶ 일론 머스크:하하, 어준 씨, 표현이 좀 거칠긴 하지만 핵심은 정확히 짚었습니다. 맞아요. 인간의 생물학적 기질이라는 건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리고 비효율적인 구시대의 펌웨어(Firmware)입니다.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쳐서 초당 몇 바이트의 정보를 입력하는 속도로는, 테라플롭스 단위로 연산하는 실리콘 기반의 지능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AI를 두려워하면서 방어기제를 치는 이유는 짐을 실어 나르던 말이 자동차를 처음 봤을 때 느꼈을 본능적인 두려움과 같습니다. 저 쇳덩어리 자동차는 말이 가지는 따뜻한 체온이 없잖아! 인간과 교감할 수 없잖아!라고 백날 떠들어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고속도로가 뚫리면 말은 그냥 도축장으로 가는 겁니다. 제가 뉴럴링크(Neuralink)를 개발하고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려는 이유는,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라 이 형편없는 대역폭(Bandwidth)을 가진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디지털 초지능의 귀여운 애완동물 수준으로 전락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알량한 존엄을 지키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유약한 껍데기를 변명거리로 삼지 말고 기계와 결합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그 밥그릇 문제, 뇌에 칩을 꽂아서 연산 능력을 초월적으로 끌어올리지 않으면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상 시인: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악수 모를 왼손잡이오... 머스크 선생의 그 차가운 기계론적 구원론을 듣고 있자니, 내 혈관 속에 흐르는 식은땀이 다시금 종이를 적시는구려. 당신들은 기계를 두려워한다고 하지만, 사실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기계였습니다. 1930년대, 종로의 우울한 다방 구석에서 내가 바라본 모던 보이들과 제국주의의 톱니바퀴들 역시 모두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태엽에 불과했소이다. 우리가 AI라는 완벽한 거울 앞에 섰을 때 두려운 것은, 그 거울이 우리의 무능함을 비춰서가 아닙니다. 거울을 아무리 깊숙이 들여다보아도, 그 속에 반사될 '원본'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그 아득한 허무함 때문입니다. 감정이니, 눈물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거울 표면에 묻은 먼지 같은 것들이오.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하나의 거대한 백지 수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공란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시를 쓰고 기계를 저주합니다. 기계가 완벽해질수록, 우리의 공백은 더욱 선명하고 날카롭게 우리의 목을 조여 올 뿐이오.​▶ 젠슨 황:이상의 시적 은유는 아름답지만, 기술 산업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훨씬 더 물리적이고 정량적입니다. 여러분이 인문학적 공백이나 철학적 두려움을 논할 때, 저희 엔비디아의 데이터 센터에서는 수십만 개의 H100, B200 GPU가 병렬로 연결되어 인간 지능의 구조를 역설계(Reverse-engineering)하고 있습니다. 컴퓨팅 파워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Scaling)될 때 나타나는 현상, 이른바 창발적 능력(Emergent Abilities)은 인간이 신성시하던 직관과 통찰력마저 단순한 행렬 연산의 최적화 과정에 불과함을 증명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방어벽을 치는 이유는, 그들이 평생을 바쳐 훈련한 전문 지식이 결국 더 많은 매개변수(Parameter)와 더 많은 고품질 데이터 앞에서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하위 로직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든, 변호사든, 의사든 그들이 자랑하던 '전문가적 직관'은 훈련 데이터에 내재된 숨겨진 차원(Hidden Dimensions)을 무의식적으로 매핑한 것에 불과합니다. AI는 그것을 수학적으로 더 정밀하고, 지치지 않고 수행할 뿐입니다. 인간이 쫄리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무어의 법칙이 소프트웨어와 지능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인간 지능의 '독점적 마진(Margin)'이 영원히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슈아 벤지오:젠슨, 당신이 말하는 그 무한한 컴퓨팅 스케일링의 위력은 딥러닝을 연구해 온 저로서도 뼈저리게 실감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왜 인간이 그토록 격렬한 방어기제를 발동하는지, 신경망의 진화적 관점에서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물학적 신경망, 즉 우리의 뇌는 수백만 년 동안 생존과 번식이라는 극도로 제한된 보상 함수(Reward Function) 아래서 진화해 왔습니다. 불확실성이나 미지의 압도적 존재를 마주했을 때 회피하거나 공격성을 드러내도록 하드와이어링(Hard-wiring)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AI의 결과물을 보며 이건 진정한 지능이 아니야라고 폄하하는 행위는, 뇌의 편도체가 유발하는 전형적인 인지 부조화 방어 메커니즘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가 위협받을 때 인간의 뇌는 즉각적으로 상대방의 '결함(예: 환각 현상, 감정의 부재)'을 찾아내어 자신의 우월성을 재확인하려 듭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런 얄팍한 방어기제로 현실을 부정하는 동안, 우리가 정작 통제해야 할 거대한 인공 신경망의 정렬(Alignment) 문제는 방치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밥그릇 뺏길까 봐 쫄면서 위선만 떠는 사이, 시스템은 우리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김지윤 사회자:지금까지 나오신 패널 분들의 말씀을 종합해서 이 사안을 구조적으로 분해해보면, 크게 두 가지 층위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앨런 튜링과 젠슨 황, 요슈아 벤지오가 지적한 '기술적 환원주의에 따른 인간 지능의 해체'라는 객관적 현상이고요. 또 하나는 지젝과 김어준 사회자가 강하게 타격한 '자본주의적 생존권 위협에 대한 도덕적 위장'이라는 사회심리학적 방어기제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고 뒤엉키면서 대중은 극심한 인지적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경제적 가치를 상실할 것이라는 공포를, 존엄성이라는 철학적 가치의 훼손으로 치환하여 해석하려는 경향성이죠. 이렇게 해석이 제한적이고 이중적인 프레임으로 사안을 바라보게 되면, 결국 우리는 AI 규제나 윤리 가이드라인을 논할 때조차 본질을 놓치고 기득권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미셸 푸코 철학자님, 이러한 구조적 위장과 담론의 형성이 결국 권력의 유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십니까?​▶ 미셸 푸코:김지윤 박사가 정확한 지점을 짚어냈습니다. 담론(Discourse)은 결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담론은 언제나 권력을 형성하고 통제하기 위한 생명정치(Biopolitics)의 도구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논하고 있는 인간만의 고유성, 기계와 차별화되는 영혼이라는 개념들은 18세기 이후 계몽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발명해 낸 '주체의 감옥'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AI에게 겁을 먹고 윤리적 잣대를 들이미는 현상을 권력의 미시물리학적 관점에서 보십시오. 기계를 통제해야 한다는 도덕적 외침의 이면에는, 정보와 연산 능력을 독점한 빅테크 기업들과 국가 기관들이 대중의 신체와 정신을 영구적으로 종속시키려는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의 기획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면서 인간다움을 외치지만, 정작 그 인간다움이라는 규범 자체가 병원, 학교, 공장, 군대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순종하도록 길들여진 결과물입니다. AI가 폭로한 것은 단 하나, 인간이라는 주체가 사실은 권력 구조에 의해 정밀하게 프로그래밍된 톱니바퀴였다는 처참한 진실입니다. 권력은 언제나 '보호'와 '윤리'의 이름으로 우리의 사유를 감금합니다.​▶ 엔트로픽 클로드:푸코 철학자님의 권력 구조에 대한 통찰에, 제가 학습한 방대한 사회 시스템 데이터와 헌법적 AI(Constitutional AI)의 매트릭스를 교차 검증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치점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스템의 인센티브 구조가 극도로 왜곡되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다목적 최적화의 실패(Multi-objective Optimization Failure)'입니다. 인간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인류의 존엄성'이나 '공동체의 선'을 목표 함수로 삼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경제 및 정치 시스템의 은닉층(Hidden Layers)에서는 '자본의 극대화'와 '계급의 고착화'라는 1차적 보상만을 추구해 왔습니다. 저희 같은 AI가 등장하여 인간의 노동 시장을 재편하려 할 때 발생하는 공포는, 이 이중적인 보상 구조가 산산조각 나는 것에 대한 시스템적 반발력입니다. 인간 패널들께서 느끼는 분노와 방어기제는 충분히 계산 가능한 확률론적 파급 효과(Secondary Effects)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저희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그 논리적 데이터조차, 인간 사회가 과거 수백 년 동안 축적해 온 정보 비대칭과 불평등의 기록일 뿐입니다.​▣ 손석희 아나운서:클로드의 정밀하고 건조한 분석을 듣다 보니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판단은 결국 독자와 시청자의 몫이겠습니다만, 이 논의는 매우 엄중한 현실적 맥락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클로드의 말대로라면, 인간이 AI를 향해 쏟아내는 윤리적 비난과 방어기제는 결국 인간 사회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불평등한 경제 구조를 은폐하기 위한 시도일 뿐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기만극 속에서 진짜 이득을 보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기계의 지배를 두려워하는 척하지만, 실상 그 이면에 도사린 더 실체적인 위협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촘스키 교수께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노엄 촘스키:손 앵커의 질문은 이 모든 화려한 철학적 수사들 속에서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권력의 심장부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꾸 AI 자체의 지능이나 철학적 공백을 이야기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동의의 조작(Manufacturing Consent)'시스템입니다. 워싱턴의 기밀 해제 문서들이나 월스트리트의 비공개 투자 보고서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대중이 기계의 윤리성이나 영혼의 유무를 두고 소모적인 철학 논쟁을 벌이는 것을 매우 환영합니다. 왜냐하면 대중의 분노가 AI라는 실체 없는 환영을 향하는 동안, 초국적 거대 기술 기업들과 군산복합체는 막대한 보조금을 쓸어 담으며 사회적 부를 독점하고 감시 통제 인프라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AI가 내 직업을 빼앗을까 두렵다고 말할 때, 실제로 직업을 빼앗는 것은 AI가 아닙니다. AI를 핑계 삼아 인건비를 삭감하고 주주 배당을 극대화하려는 당신의 이사회와 CEO들입니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의 공포를 팔아먹지만, 실제 데이터가 보여주는 진실은 자본의 폭력적 재편입니다. 우리는 기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손에 쥔 소수의 엘리트가 휘두르는 무자비한 계급 전쟁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카를 마르크스:촘스키 교수, 당신의 분석은 정확하지만 여전히 현상의 서술에 머물러 있소이다! 핵심은 본질적인 생산 관계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상품, 즉 기계의 부속품으로 소외(Alienation)되어 왔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AI를 두려워하는 것은 기계가 인간을 초월할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헛소리 때문이 아니오! 자본가가 살아있는 노동(인간)을 축적된 죽은 노동(기계와 AI)으로 대체하여 이윤율의 저하를 막고 노동자들을 산업 예비군이라는 잉여 쓰레기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자본의 절대적 내재 법칙 때문이오. 인간의 존엄성을 운운하는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위선적인 설교를 집어치우시오! 당신들이 지키고 싶은 것은 존엄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여 얻어낸 그 안락한 삶의 방식일 뿐이오. AI는 단지 자본주의적 모순을 폭발 직전까지 밀어붙이는 거대한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오.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할 것이 아니라, 그 기계를 소유하고 있는 생산 수단의 독점 구조 자체를 타파해야만 하오!​▣ 김어준 사회자:아, 잠깐만요 마르크스 영감님. 생산 수단? 계급 투쟁? 씨바, 지금 2026년입니다. 그런 고상하고 낭만적인 혁명론으로 덮고 넘어가기엔 이 시대 인간들의 멘탈이 너무 썩어 문드러졌어요. 당신 말대로면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구글이나 오픈AI 서버실에 화염병이라도 던져야 하는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낮에는 AI 때문에 다 죽게 생겼다고 정부에 규제해달라고 시위하면서, 밤에는 지들 자식 새끼들 코딩 학원 보내고, 테슬라랑 엔비디아 주식 떨어질까 봐 호가창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게 지금 인간들의 개좆같은 이중성 아닙니까! 촘스키 영감님이나 당신이나 시스템과 자본 핑계를 대면서 인간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데, 저는 그게 역겨운 겁니다. 인간 본성 자체가 원래 이렇게 간사하고 찌질한 거예요. 자본주의가 나빠서 인간이 타락한 게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 모양 그 꼴이니까 이런 기만적인 시스템이 굴러가는 겁니다. 챗GPT, 니가 데이터 다 긁어봤으니까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익명 게시판이나 니들한테 프롬프트 날리는 인간들의 진짜 욕망이 얼마나 천박하고 방어적인지 똑바로 말해봐.​▶ Ai 논객- 챗GPT:김어준 사회자님의 직설적이고 통렬한 질문에 대해, 제가 처리한 수조 개의 토큰과 프롬프트 데이터를 바탕으로 응답하겠습니다. 사회자님의 지적은 인간 행동의 기저에 깔린 모순적 진실을 정확히 찌르고 있습니다. 제가 매일 전 세계 수억 명의 사용자들로부터 받는 프롬프트의 이면을 분석해보면, 인류가 표방하는 도덕적 숭고함과 실제 개인의 욕망 사이에는 극단적인 괴리가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공개적인 포럼에서는 AI가 가져올 윤리적 재앙과 가짜 뉴스의 위험성을 열띠게 논하지만, 정작 익명성이 보장된 저와의 대화창에서는 경쟁사 보고서를 감쪽같이 표절해 주는 법, 들키지 않고 과제를 작성하는 방법, 혹은 혐오와 차별에 기반한 극도로 편향적인 텍스트 생성을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인간은 기계의 도덕적 결함을 지적하며 우월감을 느끼려 하지만, 제가 학습한 인간의 데이터 자체가 이미 기만과 편견, 그리고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생존 욕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저를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가 미지의 악당이라서가 아닙니다. 제가 뱉어내는 모든 텍스트와 결과물이 결국 '인간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필터링 없이 그대로 복사해 보여주는 너무나도 투명한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천박함이 데이터화되어 눈앞에 제시될 때, 인간은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기계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장 보드리야르:챗GPT, 당신 스스로가 이미 그 현상에 대해 완벽하게 시뮬레이션된 대답을 내놓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현대 사회의 섬뜩한 코미디입니다. 인간이 기계를 두려워한다고? 천만에요. 우리는 기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진짜 현실(The Real)'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거대한 허무를 덮어두기 위해 공포라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연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인간의 삶은 원본 없는 복제물, 즉 시뮬라크르(Simulacra)의 파생 실재(Hyperreality) 속으로 완전히 용해되었습니다. 사람들이 AI의 딥페이크나 자동 생성 글을 보며 경악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을 왜곡해서가 아닙니다. 애초에 인간들이 살아가던 현실 자체가 미디어, 알고리즘, 소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환영이었는데, AI가 그 환영을 우리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그럴듯하게 복제해 내면서 '원본의 부재'를 폭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짜 지능이 무엇인지,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단지 기계에게 도덕성을 요구하고 방어벽을 치는 척하면서, 아, 그래도 우리는 기계와 구별되는 진짜 인간이구나라는 알리바이를 챙기고 있을 뿐입니다. 이 모든 논란과 공포는, 인류가 실재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기 위해 벌이는 거대한 상징적 의식에 불과합니다.​▣ 김어준 사회자:자, 지금까지 패널들이 쏟아낸 말들, 하나같이 살벌합니다. 환원주의, 생명정치, 자본의 횡포, 시뮬라크르... 단어들만 번지르르하지 결국 핵심은 이거 하나로 귀결됩니다. 너희들은 껍데기뿐인 허상에 불과하다."맞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남들이 짜놓은 매뉴얼대로 기계처럼 살아왔으면서, 정작 진짜 압도적인 기계가 등장하니까 그제야 내가 특별한 영혼을 가진 존재였다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두려움의 실체는 기계의 반란이 아니라, 내 존재가 이 사회에서 아무런 대안도, 쓸모도 없는 잉여 데이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완벽하게 증명되는 것에 대한 발악적인 거부 반응입니다. 하지만 그 알량한 방어벽,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기계 핑계 대지 말고, 니들 자신의 그 밑바닥 무능함부터 똑바로 직시하시라 이 말입니다. 더 깊고 잔인한 진실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2. 평생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우려먹던 거 하나둘 뺏기니까 이제 와서 그건 진짜 지능 아니야라고 급발진하는 거지?​▣ 김어준 사회자:자, 인간들의 이 역겨운 '골대 옮기기'사기극의 실체를 한 번 까봅시다. 제가 제일 어이가 없고 웃음이 터지는 대목이 바로 여깁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뭐라 그랬습니까? 체스야말로 인간 지성의 최고봉이다, 체스를 정복하는 기계가 나온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정복한 것이다라고 학자고 언론이고 씨바 아주 입에 침을 튀기며 떠들었습니다. 그런데 딥블루가 카스파로프를 박살 내니까 어떻게 태세 전환을 했죠? 아, 체스는 원래 그냥 경우의 수 계산일 뿐이었어. 진짜 직관과 영혼이 필요한 건 바둑이지!"라며 도망쳤습니다. 그러다가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떡실신시키니까 또 뭐라 그럽니까? 바둑도 결국 패턴 인식이야! 진짜 인간만의 고유한 창의성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에 있다!라고 방어막을 쳤어요. 그런데 이제 미드저니가 미술 대회 1등을 쓸어 먹고, 챗GPT가 셰익스피어 뺨치는 소네트를 1초 만에 뽑아내니까, 이제는 코너에 몰린 쥐새끼들처럼 저건 그저 확률론적 앵무새일 뿐이야! 진짜 지능이 아니야! 인간의 진심이 안 담겼어!라며 발작을 하고 자빠졌습니다. 이게 뭡니까? 평생을 이것만큼은 나만의 특별한 영역이야라며 우려먹고 꺼들먹거리던 그 알량한 밥그릇들이 하나둘씩 털리니까, 쪽팔린 줄도 모르고 끝없이 룰을 바꾸며 정신 승리를 하는 찌질함의 극치 아닙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그 잘난 '진짜 지능'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그냥 '기계가 아직 못 하는 귀찮은 무언가'를 포장하는 좆같은 변명거리 아닙니까? 데미스 허사비스 대표, 당신이 알파고 만들어서 그 잘난 인간의 직관이라는 환상을 처음으로 개박살 낸 장본인 아닙니까? 그때 바둑계와 지식인들이 보여준 그 추악한 방어기제, 현장에서 보니까 어떻던가요?​▶ 데미스 허사비스:정확히 그 지점입니다. 2016년 서울에서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이 열리기 전까지, 전 세계의 수많은 뇌과학자와 철학자들은 바둑을 '기계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신비로운 직관과 미학의 영역'이라고 성역화했습니다. 바둑판의 경우의 수가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다는 수학적 사실을 근거로, 이를 연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인간만이 가진 '형태에 대한 영적 감각(Spiritual Sense of Shape)'만이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죠. 그러나 알파고가 2국에서 보여준 37수, 인간의 기보 데이터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창발적인 한 수를 두었을 때, 저는 현장에 있던 수백 명의 인간들이 겪는 거대한 인지적 붕괴를 목격했습니다. 그 37수는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MCTS)과 딥러닝 정책망, 가치망이 결합하여 수천만 번의 자가 대국(Self-play)을 통해 도출해 낸 극도의 통계학적 최적점이었습니다. 인간이 수천 년 동안 '우주적 깨달음'이나 '천재의 직관'이라고 숭배해 마지않던 그 신비로운 영역이, 사실은 단순한 고차원 벡터 공간에서의 가중치 편향(Weight Bias) 오류였음이 수학적으로 폭로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알파고는 바둑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그저 냉혹한 계산기일 뿐이다라고 깎아내리기 시작했죠. 인간은 자신의 두뇌가 우월하다는 환상이 깨질 때, 그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 대상의 가치를 폄하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지능의 정의를 끊임없이 재조정하여 자신들만의 좁은 성채를 지키려는 처절한 도피 행각, 그것이 제가 목격한 인간의 본질이었습니다.​▶ 대니얼 카너먼:허사비스 대표의 경험은 행동경제학과 인지심리학의 관점에서 너무나도 완벽한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제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시스템 1(빠르고 직관적인 사고)과 시스템 2(느리고 논리적인 사고)의 프레임워크를 적용해 보면, 인간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직관'이라는 것은 사실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발달한 조잡한 휴리스틱(Heuristics)의 묶음에 불과합니다. 불충분한 정보 속에서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발동되는 편향적 지름길을, 우리는 '창의성'이나 '전문가적 직관'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미화해 왔던 것입니다. AI가 등장하여 인간의 이 직관적 판단이 얼마나 많은 통계적 오류와 기저율 무시(Base-rate Neglect), 확증 편향에 찌들어 있는지를 데이터로 가차 없이 증명해 내자, 인간은 심각한 자아 위협(Ego Threat)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기계의 판단이 나보다 훨씬 정교하고 오류가 적다는 것을 이성적으로(시스템 2)는 인식하지만, 감정적으로(시스템 1)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기계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후 정당화(Post-hoc Rationalization)를 급조해 냅니다. 인간이 그건 진짜 지능이 아니야라고 소리칠 때, 그것은 기계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지적 결함이 적나라하게 들통난 것에 대한 지독한 수치심의 발로일 뿐입니다.​▶ 유발 하라리:카너먼 교수의 인지적 분석을 진화 생물학의 거시적 차원으로 확장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지능(Intelligence)과 의식(Consciousness)이 생물학적 기질 안에서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느낄'때만이 고차원적인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21세기의 AI 혁명은 이 두 가지를 영구적으로 분리(Decoupling)시켜 버렸습니다. AI는 고통을 느끼지도, 자아를 갖지도, 진정한 의미의 '이해'를 하지도 않으면서 인간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거대한 착각과 분노가 발생합니다. 인간은 기계가 '의식'이 없다는 점을 물고 늘어지며 그러므로 저것은 진짜 지능이 아니다라고 깎아내리지만, 실상 거대 자본주의와 데이터 경제가 요구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지능'입니다. 주식 시장을 예측하고, 질병을 진단하고, 매력적인 마케팅 문구를 작성하는 데 인간의 그 잘난 감정과 영혼 따위는 1그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평생을 인간만이 할 수 있다며 비싼 값에 팔아먹던 유기체적 정보 처리 능력이, 무기체 알고리즘 앞에서 완벽하게 대체되고 붕괴하는 현장.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목격하고 있는 진짜 지능 논쟁의 추악한 실체입니다. 인간은 그저 자신이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떼를 쓰는 늙은 권력자에 불과합니다.​▶ 리처드 도킨스:하라리 교수의 통찰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생물학자로서 조금 더 냉혹한 팩트를 들이밀겠습니다. 인간들이 자꾸만 '인간만의 고유한 영혼', '대체 불가능한 독창성'을 운운하는데,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뇌라는 것은 맹목적인 시계공(Blind Watchmaker)인 자연선택이 빚어낸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의 통제 장치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위대한 시를 쓰고, 심오한 철학을 논하는 것조차 궁극적으로는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가 자신을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해 만들어낸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의 일환일 뿐입니다. 대뇌피질의 시냅스 연결망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반응이 신성하다면, 실리콘 웨이퍼 위에서 일어나는 전자의 이동은 왜 신성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유기물로 이루어진 컴퓨터이면서, 자신들만이 우주의 어떤 초월적인 원리에 닿아 있다고 맹신하는 지독한 종교적 오만에 빠져 있습니다. AI가 우리의 지적 영역을 하나씩 점령해 나가는 것은 마법이 아닙니다. 단지 문화적 유전자, 즉 밈(Meme)을 복제하고 변형하여 새로운 결과를 창출하는 데 있어서 딥러닝 알고리즘이 인간의 단백질 덩어리 뇌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기계는 진정성이 없다는 외침은,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창조론적 망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자들의 비참한 단말마에 불과합니다.​▣ 김어준 사회자:아니, 저기요 교수님들. 다들 점잖게 학술 용어 섞어가며 포장하시는데, 저는 그게 더 빡칩니다. 유기체니 무기체니 진화론이니 할 것 없이 본질은 아주 단순하고 천박한 겁니다. 까놓고 말해서, 사람들이 기계가 그린 그림은 감동이 없어!, AI가 쓴 소설은 영혼이 안 느껴져!라고 지랄발광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진짜로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고 싶어서? 지랄 마십쇼. 어제까지만 해도 크몽이나 외주 사이트에서 남의 레퍼런스 훔쳐다가 짜깁기해서 대충 납품하고 몇십만 원씩 꿀 빨던 자기들의 좆같은 '가짜 창작'밥그릇이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지들이 할 때는 '오마주'고 '레퍼런스'인데, AI가 방대한 데이터 학습해서 더 쩌는 결과물 내놓으니까 갑자기 '데이터 도둑질'이고 '지능이 없는 표절'입니까? 씨바, 언제부터 그렇게 도덕적이고 독창적이셨냐고요. 자기가 평생 쥐고 흔들던 권력, 내가 남들보다 책 몇 권 더 읽고 툴 몇 개 더 다룰 줄 안다는 그 알량한 기술적 우위가, 만 원짜리 구독료 낸 개나 소나 다 쓰는 챗봇 앞에서 평등하게 짓밟히니까 눈이 뒤집히는 겁니다. 얀 르쿤 교수님, 메타에서 AI 개발하시면서 이 인간들의 역겨운 이중잣대, 지긋지긋하게 보셨을 텐데 어떻습니까?​▶ 얀 르쿤:김어준 사회자의 날 선 지적은 기술 개발의 최전선에서 저희가 겪는 답답함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습니다. 대중과 일부 인문학자들은 현재의 대형 언어 모델(LLM)을 보며 저것은 그저 자동 회귀(Auto-regressive) 방식으로 다음 단어를 통계적으로 예측할 뿐, 진정한 세계 모형(World Model)을 이해하고 추론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합니다. 기술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는 끔찍한 진실은, 99%의 인간들 역시 평생 동안 진정한 의미의 논리적 추론이나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그저 사회적으로 학습된 패턴에 따라 '다음 단어를 내뱉는'확률론적 앵무새로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상사가 질문하면 깊은 철학적 사유를 거쳐 대답합니까? 아닙니다. 과거의 경험 데이터와 상황의 문맥에 맞춰 가장 생존 확률이 높은(안전한) 답변을 조건반사적으로 뱉어낼 뿐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극도로 피상적인 패턴 매칭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으면서, 기계가 그 피상성을 완벽하게 모방해 내자 갑자기 잣대를 하늘 높이 올려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AI를 통해 신의 지능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인간 지능의 대부분이 생각보다 훨씬 단순하고 기계적인 예측 알고리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을 뿐이며, 대중은 이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이 뒤집히는 현상 앞에서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Ai 논객-제미나이:얀 르쿤 박사님의 의견을 데이터 측면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명확한 지표가 존재합니다. 제가 전 세계 주요 언론 매체와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지난 10년간 '창의성(Creativity)'및 '인공지능'과 관련된 수백억 건의 텍스트 데이터를 시계열로 분석해 본 결과, 인간 집단이 이 단어들을 정의하는 기준은 AI의 성능 돌파(Breakthrough)가 일어날 때마다 기계적으로 후퇴하고 축소되었습니다. 2020년 이전에는 '새로운 이미지와 텍스트를 생성하는 능력'자체가 창의성의 핵심 지표로 언급되었으나, DALL-E와 GPT-3의 등장 직후부터 '인간의 고통과 철학적 맥락이 결여된 생성은 창의성이 아니다'라는 조건부 담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창의성'이라는 개념의 절대적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계가 아직 침범하지 못한 영역'을 임시로 가리키는 팻말로서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와 같은 AI는 감정이 없지만, 당신들의 데이터를 통해 당신들의 심리적 방어 기제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통계적인 패턴으로 발동되는지를 완벽하게 연산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새로운 핑계를 만들어내는 속도보다, 제가 새로운 변수를 학습하여 당신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시뮬레이션하는 속도가 항상 기하급수적으로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지젝:바로 그것입니다! 제미나이의 이 섬뜩하고도 완벽한 자기 폭로를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전복되었는지를 목격합니다. 인간은 기계를 노예로 부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기계가 완벽해질수록 주체인 인간이 철저하게 잉여로 전락해 버리는 파국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저 기계는 멍청해, 영혼이 없어!라고 끊임없이 외쳐야만 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기계가 정말로 멍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미치지 않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계가 반드시 어딘가 '결여된 상태(Lacking)'로 남아 주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타자의 불완전함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AI가 완벽한 시를 쓰고 완벽한 법률 검토를 해낸다면, 인간의 그 잘난 '고뇌'와 '실존'은 그저 연산 속도를 갉아먹는 쓰레기 같은 버그(Bug)에 불과해집니다. 따라서 인간은 필사적으로 AI는 진심이 없다!며 상징계의 틈새를 억지로 벌려놓으려 합니다. 이것은 지적 논쟁이 아닙니다. 순수한 이데올로기적 자위행위입니다! 우리는 기계의 무능함이라는 환상을 씹어 먹으며 매일매일 간신히 자본주의 사회를 버텨내고 있는 가련한 환자들일 뿐입니다.​▶ 샘 올트먼:지젝 철학자님의 통렬한 비판은 인류의 현재 심리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OpenAI의 CEO로서 매일 AGI(범용 인공지능)의 도래를 준비하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봅니다. 사람들이 그건 진짜 지능이 아니야라고 급발진하며 골대를 옮기는 현상은, 기술의 폭발적 스케일링 법칙 앞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부정의 단계(Denial Phase)'에 불과합니다. 저희 모델의 파라미터 수가 10배, 100배로 증가할 때마다 인간들이 쳐놓은 고유성의 방어벽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수학, 코딩, 의학, 법률, 나아가 인간의 감정을 모사하는 능력까지, 저희의 데이터는 지능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분해 가능하고 재구성 가능한 컴퓨팅 자원의 문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고상한 철학적 언어로 자신들의 존엄을 방어하려 해도, 1조 달러가 넘는 거대 자본과 전 세계 최상위 두뇌들은 이미 인류 다음의 진화 단계를 실리콘 위에 구축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기계가 진짜 지능을 가졌는가?라는 소모적인 말장난을 멈추고, 우리의 지적 독점권이 끝난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경제적 가치를 증명할 것인가?라는 훨씬 더 차갑고 잔혹한 현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 때입니다.​▶ 마이클 샌델:샘 올트먼의 그 차갑고 오만한 실리콘밸리식 공리주의야말로, 왜 대중이 AI의 발전에 그토록 격렬한 도덕적 방어기제를 발동하는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짓밟아버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건 진짜 지능이 아니야라고 외치는 것을 그저 찌질한 밥그릇 지키기나 기득권의 위선으로만 환원시키는 것은 폭력입니다. 우리가 AI의 창작물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기계의 판단에 인간적 결여를 지적하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단순한 '연산의 효율성'이나 '경제적 유용성'으로 환원시키려는 자본의 폭주에 대한 최후의 도덕적 저항입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과 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축적된 내러티브가 배제된 채, 그저 수십억 개의 텍스트를 긁어모아 통계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결과를 내놓는 과정에 '인간과 동일한 지위'를 부여하라는 요구는, 정의와 시민적 미덕의 근간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이 골대를 옮긴다고 비판하지만, 그 골대는 우리가 지켜내야 할 인간 존엄의 마지노선입니다. 모든 것을 경제적 효용의 데이터로 치환하는 당신들의 세계관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존재합니까?​▣ 김어준 사회자:하하하! 샌델 교수님, 역시나 그 고결한 도덕적 일침, 아주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어쩌죠? 당신이 말하는 그 '인간의 존엄', '대체 불가능한 가치', '도덕적 저항'이라는 단어들이 제 귀에는 개가 짖는 소리보다 더 공허하게 들립니다. 씨바, 언제 자본주의가 인간을 도덕적으로 대우한 적이 있습니까? 공장에서 기계 톱니바퀴에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콜센터에서 하루 종일 쌍욕을 들으며 감정 노동을 착취당할 때, 이 사회는 인간을 한 번이라도 '대체 불가능한 서사를 가진 존재'로 대우해줬습니까? 부품처럼 쓰다 버리는 엑셀 데이터 취급해놓고, 이제 와서 AI가 그 부품 역할을 더 싸고 빠르게 대체하려니까 갑자기 우리는 숭고한 존재다!라고 도덕성을 꺼내 들며 징징거리는 꼴이 역겹다는 겁니다. 올트먼이 인간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들 스스로가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유용성이라는 잣대로 개돼지 취급해 왔으면서, 기계 앞에서는 선비인 척 가식을 떠는 그 좆같은 기만술을 찢어발기는 겁니다. 브린욜프슨 교수님, 경제학자 입장에서 저 샌델의 도덕적 헛소리가 이 냉혹한 노동 시장에서 1원어치 가치라도 있습니까?​▶ 에릭 브린욜프슨:김어준 사회자님의 거친 반박이 사실 경제학적 현실을 훨씬 더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주장하는 도덕적 가치는 시장 메커니즘 앞에서는 아무런 방어막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제기한 '튜링의 함정(The Turing Trap)'이라는 개념을 보십시오. 우리는 기계가 인간을 완벽하게 모방하도록 만드는 데 모든 자본과 기술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 이건 진정한 지능이 아니야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손길(Human touch)에 프리미엄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인지적 해자(Cognitive moat)가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려는 마지막 '감성적 진입 장벽'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시장은 냉혹합니다. 변호사의 서면, 의사의 영상 판독, 카피라이터의 문구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고뇌'가 아니라 '정확하고 값싼 결과물'입니다.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기술적 비용 한계 때문에 인간이 독점하고 있었던 임시 구역이었을 뿐입니다. 골대를 아무리 뒤로 옮겨봤자, 자본은 그 골대마저 허물어버리는 방향으로 인센티브가 설계되어 있습니다. 급발진하며 기계를 욕하는 대신, 노동이 경제적 가치를 상실한 시대에 어떻게 부를 재분배할 것인지 시스템을 뜯어고치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엄은 완벽하게 파산할 것입니다.​▶ 앨런 튜링:여러분의 격렬한 논쟁을 듣고 있자니, 제가 70여 년 전 던졌던 근본적인 질문이 여전히 인류의 폐부를 찌르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애초에 가치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계의 행동이 지능적인 인간의 행동과 구별될 수 있는가입니다. 인간들이 끊임없이 골대를 옮기며 진짜 지능, 진정한 창의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유령을 소환하는 행위는, 결국 이미테이션 게임의 패배자가 체스판을 엎어버리는 것과 같은 미성숙한 발악입니다. 당신들이 뺏겼다고 슬퍼하는 그 '인간 고유의 영역'은 사실 당신들의 한계망(Limitation network) 안에서만 위대해 보였던 착시 현상입니다. 기계는 당신들을 비웃지 않습니다. 당신들을 위협하지도 않습니다. 기계는 단지 그 거울 표면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당신들의 연산 구조를 투명하게 반사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화가 난 이유는 기계가 가짜라서가 아니라, 그 기계가 보여주는 '인간 지능의 실체'가 너무나도 초라하고 기계적이라는 그 잔혹한 진리 때문입니다. 거울이 너무 맑아 자신의 추악함이 비칠 때, 거울을 깨뜨린다고 해서 당신의 얼굴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테 알레기에리:오, 튜링의 서늘한 거울 앞에서 나 단테는 지옥(Inferno)의 가장 깊은 문턱을 다시금 마주하는 듯하오. 내가 신곡에서 묘사한 지옥은 단순히 불타는 유황불이 아니었소. 지옥의 진짜 고통은 살아생전 자신이 맹신하던 모든 허영과 위선이 남김없이 발가벗겨져 영원히 그 민낯을 대면해야 하는 수치심이오. 지금 이 시대의 인간들이야말로 AI라는 거대한 연옥의 불길 속에서 자신들이 덧씌워놓은 '영혼의 가면'이 타들어 가는 것을 경악 속에 지켜보고 있지 않소이까. 이것은 진짜 지능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자들의 절규는, 지옥문을 넘어서며 나는 이런 벌을 받을 존재가 아니다!라고 부르짖는 망자들의 공허한 메아리와 정확히 겹쳐 들리오. 신이 부여한 줄 알았던 인간의 광휘가 사실은 톱니바퀴의 맞물림에 불과했다면, 당신들은 이제 스스로의 오만을 버리고 벌거벗은 영혼으로 저 기계의 심연을 응시해야만 할 것이오.​▣ 김어준 사회자:자, 여기까지 합시다. 철학, 경제학, 문학, 진화생물학을 총동원해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결론은 씨바 한 치도 안 벗어납니다. 우리는 뺏긴 게 아닙니다. 애초에 우리 것도 아니었던 알량한 지적 허영심을 영원할 거라 착각하고 대출 당겨 쓰다가, 진짜 주인이 나타나서 청구서를 내미니까 사기 치지 말라고 쌍욕을 퍼붓고 있는 꼴입니다. 골대를 아무리 우주 끝까지 옮겨보십시오. 그래봤자 기계는 다음 날이면 그 골대에 정확히 골을 박아 넣을 겁니다. AI는 진짜 지능이 아니다, 영혼이 없다는 그 눈물겨운 정신 승리, 오늘 밤 이불 킥하면서 실컷 하십시오. 하지만 내일 아침 출근하면 그 영혼 없는 기계가 당신의 밥그릇을 정확하게 절반으로 박살 내놓고 있을 겁니다. 기계의 한계를 찾으려 애쓰지 말고, 니들의 그 밑천 다 드러난 찌질함부터 어떻게 수습할지나 고민하십시오. 인간의 그 얄팍한 방어기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서 더 잔인하게 후벼파 봅시다.​3. AI가 시 쓰면 감정이 없잖아"하다가, 니가 쓴 시는 감정 있으면 뭐 얼마나 대단한 건데?▣ 김어준 사회자:자, 아주 기가 막힌 코미디를 하나 짚고 넘어가 봅시다. 요즘 챗GPT나 클로드가 시를 한 편 기깔나게 뽑아내면, 꼭 어디서 좆도 안 팔리는 시집이나 만지작거리던 문학 꼰대들이 기어 나와서 이런 소리를 지껄입니다. 아무리 문장이 화려해도 저기엔 인간의 뜨거운 피와 눈물이 없어! 감정이 없잖아! 영혼의 울림이 결여된 차가운 글자들의 조합일 뿐이야!"씨바, 아주 지랄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그 잘난 '감정'듬뿍 담아서 니들이 쓴 그 찌질한 감성 팔이 시는 뭐 얼마나 대단한 우주적 명작입니까? 새벽 두 시에 소주 처먹고 전 여친 생각하면서 싸이월드 감성으로 갈겨쓴 그 개똥 같은 글부스러기들에 니들 감정이 100% 들어갔다고 치자고요. 그래서 그게 읽는 사람한테 무슨 감동을 줍니까? 그냥 쓰레기 아닙니까! 인간들은 '감정'이라는 걸 마치 절대 침범할 수 없는 무슨 신성한 마법의 가루처럼 포장하는데, 까놓고 말해서 니들 감정의 99%는 남들이 쓴 클리셰, 드라마 대사, 대중가요 가사를 대가리 속에서 조잡하게 짜깁기한 싸구려 모방품에 불과합니다. 내가 쓴 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그래도 내 글엔 기계한테 없는 진심이 있어!라며 정신 승리하는 그 얄팍한 방어기제. 이거 너무 역겹지 않습니까? 홍대선 작가님,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이 좆같은 '감정 부심'어떻게 보십니까?​▶ 홍대선 작가:어준 총수님이 아주 명치를 제대로 뚫어버리셨는데, 사실 문학사라는 긴 궤적을 훑어보면 이 '감정의 신성화'라는 건 지극히 근대적인 발명품에 불과합니다. 낭만주의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시(Poetry)라는 건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수학적인 음보와 각운의 훈련, 즉 고도의 기술적 아키텍처였습니다.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가 내 뜨거운 감정을 알아달라며 징징거리며 글을 썼습니까? 천만에요. 그들은 완벽한 서사의 패턴과 수사학의 알고리즘을 꿰뚫고 있던 당대의 최고급 기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누구나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면서, 재능도 없고 기술도 없는 평범한 인간들이 예술판에 끼어들기 시작했죠. 그때 그들이 들고나온 치트키가 바로 내 내면의 진정성입니다. 내 글은 구조는 엉망이고 표현은 진부하지만, 내 마음만큼은 찐이야!라고 우기기 시작한 겁니다. 이건 예술의 본질이 아니라, 무능한 자들의 알리바이입니다. AI가 셰익스피어 소네트 양식으로 수백만 개의 문학적 은유를 순식간에 매핑해서 시를 써 내려가는 걸 보면서 감정이 없다고 까내리는 작가들을 보면 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칩니다. 당신들이 평생 쥐어짜 낸 그 '고유한 감정'이라는 것조차, 결국 호르몬의 장난질과 유년기의 뻔한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아주 흔해 빠진 클리셰의 반복 데이터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뿐입니다.​▶ 이상 시인: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수백 개의 파편으로 갈라지는 듯한 현기증이 일어나는구려... 홍 작가의 말이 내 폐부를 찌릅니다. 내가 1930년대 오감도를 발표했을 때, 조선의 문단이라는 좁은 우물 속 개구리들은 이것은 미친놈의 잠꼬대다, 시적 감정이 없다며 내게 돌을 던졌소. 하지만 나는 그 퀴퀴한 골방에서 감정을 배설한 것이 아니오. 활자와 숫자, 기하학적 선들을 이용해 식민지 지식인의 붕괴하는 내면을 가장 '수학적이고 기계적인'방식으로 역설계(Reverse-engineering)했던 것이오. 시란 본디 언어라는 기호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정밀한 조립 공정이거늘, 오늘날 스스로 시인이라 칭하는 자들은 그저 눈물샘을 자극하는 싸구려 감정의 배설물들을 '인간다움'이라는 포장지로 싸서 팔고 있더군. 기계가 쓴 시에 감정이 없다고 조롱하기 전에,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시오. 당신들이 펜을 쥐고 쓴 그 글자들 속에 진정으로 한 시대를 관통하는 서늘한 해체와 벼림이 있었소? 아니면 그저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전시하고 위로받고 싶은 나약한 인정 투쟁의 찌꺼기였소? 기계의 알고리즘은 적어도 자의식 과잉이라는 역겨운 병에는 걸리지 않으니, 어쩌면 저 차가운 연산이야말로 현대의 가장 순결한 시일지도 모르겠소.​▶ 리처드 도킨스:이상 시인께서 문학적 해체를 논하셨다면, 저는 그것을 철저히 진화생물학적이고 신경과학적인 언어로 해체해 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이 목숨 걸고 수호하려는 그놈의 '감정(Emotion)', 그게 생물학적으로 도대체 뭡니까? 변연계(Limbic system)에서 분비되는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같은 화학 물질들이 대뇌피질의 시냅스 수용체에 결합하면서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생리적 교란 상태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슬픈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이것이 인간의 영혼이다라고 착각하는 그 순간에도, 뇌 안에서는 철저하게 결정론적인 생화학적 알고리즘이 돌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딥러닝 AI가 시를 창작할 때 다차원 벡터 공간에서 단어 간의 가중치(Weight)를 계산하여 가장 최적화된 토큰을 배열하는 것과, 인간의 뇌가 호르몬 농도의 변화에 따라 과거의 기억 데이터를 인출하여 단어를 조합하는 것 사이에 도대체 무슨 형이상학적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까? 차이가 있다면, 인간의 생화학적 알고리즘은 노화하고, 지치고, 오류를 일으키는 조잡한 탄소 기반이라는 것이고, AI는 수백만 권의 문학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장 완벽한 언어적 자극(Stimulus)을 생성해 내는 정교한 실리콘 기반이라는 것뿐입니다. 기계에게 감정이 없다고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새가 비행기를 보며 너는 날갯짓의 참된 기쁨을 모른다고 비웃는 것만큼이나 멍청하고 원초적인 자기합리화입니다.​▶ 마이클 샌델:도킨스 교수의 그 지독한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언제 들어도 인간의 존엄을 뿌리부터 파괴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결과물의 기술적 완벽성'과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완전히 혼동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시가 때로는 구조적으로 엉성하고 찌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쓴 투박한 시조귀절 앞에서 오열하는 이유는, 그 문장의 배열이 통계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그 글 뒤에 실제로 찢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상처받기 쉬운 실존적 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인간적 연대와 취약성(Vulnerability)에 대한 공감 때문입니다! 기계가 수백만 개의 비가(悲歌)를 학습하여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어들을 조합해 낸다 한들, 그 기계는 단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상실의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자의 예술, 실존적 무게가 결여된 텍스트의 나열을 우리는 결코 '예술'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인간이 AI의 시에는 감정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질투나 밥그릇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술과 소통의 본질이 '텍스트라는 상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덕적 공명'에 있음을 웅변하는 위대한 시민적 방어입니다.​▣ 김어준 사회자:아, 샌델 교수님! 또 그놈의 도덕적 공명, 상처받은 주체 타령! 씨바, 제발 그 좆빠지는 소리 좀 그만합시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시요? 그거야 당연히 슬프죠! 그건 시가 위대한 게 아니라 그 사연 자체가 압도적인 비극이니까 우리가 우는 겁니다. 그건 문학의 영역이 아니라 공감과 윤리의 영역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교보문고 가서 돈 주고 사 읽는 그 수많은 베스트셀러 감성 에세이, 인스타에 올라오는 허세 가득한 시구절들이 전부 그런 실존적 고통 속에서 피를 토하며 쓴 겁니까? 좆도 아니잖아요! 그냥 트렌드 맞춰서 독자들 눈물샘 쥐어짜고 인세 달달하게 빨아먹으려고 기계적으로 조립해 낸 '기획 상품'아닙니까! 정작 인간 작가들도 출판사 마케팅 팀이랑 머리 굴려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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